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티오키아 공국 (문단 편집) === 레몽 루벤의 정복 === 그러나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결국 아르메니아 왕국에게 굽히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4차 십자군|몇년 전에 있었던 십자군이 동로마 제국이나 짓밟고]] 성지의 정세에 아무런 긍정적 영향을 끼치지 못했기 때문에 교황은 성지를 향한 새로운 십자군을 조직해야만 했는데, 그러기 위해선 성지의 입구에 서 있는 [[아르메니아 왕국]]의 지원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1213년경, 교황은 레오를 희사하고 성전 기사단원에게 바그라스를 제외한 다른 영지를 돌려준다면 정벌하겠다는 교서를 취소하겠다는 유화책을 펼쳤다. 그뿐만 아니라 1214년경 [[예루살렘 왕국]]의 장 드 브리엔은 레오의 딸과 결혼하면서 친 안티오키아적 외교 정책을 선회해 아르메니아를 우대하기 시작했다. 보에몽 4세의 입지는 약해지고 있었다. 아르메니아의 레오와 연대한 [[아사신]]파가 [[알레포]] 지역을 중심으로 안티오키아를 괴롭혔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원래 그와 동맹이었던 투르크 영주들과 갈등이 생겨 연대가 끊기고 말았다. 레오에게는 최적의 기회였다. 이제 그와 레몽 루벤이 자력으로 제거해야 할 적은 단 둘 뿐이었다. 바로 안티오키아 민회의 시민군들과, [[성전 기사단]]이었다. 보에몽이 계속 패배하면서도 안티오키아 민회의 지지를 얻어 자꾸만 왕좌를 탈환하였었다. 또한 성전 기사단원들은 잘 훈련된 기사단원들과 자금력을 뽐내면서 보에몽의 재기를 수도 없이 도왔었다. 두 수족을 끊어놓기 위해 레오는 먼저 안티오키아 민회의 시민군 대표 아카리에를 매수했다. 그리고 마지막 [[성전 기사단]]을 견제하기 위해 그들의 오랜 숙적이자 라이벌인 [[구호 기사단]]을 끌어들였다. 레오는 안티오키아를 점령하면 성전 기사단원들의 압류물품들과 성채들을 모두 구호 기사단에게 넘기겠다고 단언했고, 구호기사단은 앞장서서 안티오키아 함략을 도왔다. 결국 1216년, 보에몽이 군대를 이끌고 자리를 비운 사이 아르메니아군이 야음을 틈타 안티오키아 성벽을 넘었다. 일부 민회 시민군들과 성전 기사단은 결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결국 병력 부족으로 거의 무혈에 가까운 입성을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 레몽 루벤은 공작이 되었고, 안티오키아 공국은 [[아르메니아 왕국]]의 공작령으로 전락했다. 레오는 끝까지 저항했던 성전 기사단의 용기에 감탄해 바그라스 성채만은 성전 기사단원들에게 그대로 남겨두고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것을 도왔다. 레몽 루벤은 그렇게도 원하는 안티오키아를 얻었으나, 그가 피흘려 얻은 안티오키아의 상태는 거의 공백에 가까웠다. 주력군은 보에몽 4세와 함께 [[예루살렘 왕국]]에 가 있었고, 공국의 방위를 담당하던 [[성전 기사단]]은 후퇴해서 공국 내에서는 해체 상태였던데다, [[아르메니아 왕국]]의 외할아버지 레오 왕은 북방에서 쳐들어온 카이카우스 1세와 투르크인, 아르메니아 내의 반란을 진압하러 병력들과 함께 떠났고, 남은 재산마저 지원을 약속했던 [[구호 기사단]]에게 퍼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결국 안티오키아의 신민들을 쥐어짜 착취한다는 악수를 두었고, 1217년에는 민회의 반란에 직면하기도 할 정도로 민심도 최악이었다. 그러는 동안, 보에몽 4세는 예루살렘 전역을 돌아다니며 지원을 애타게 바랬다. 옛 동맹 [[성전 기사단]]이 그를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예루살렘 왕국]] 왕 장 드 브리엔도 보에몽을 정당한 안티오키아의 주인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보에몽의 힘은 미약했다. 그는 1219년까지 레반트 지역을 떠돌며 안티오키아 공국을 되찾기 위해 와신상담해야 했다. 몇 년이 지나, 레몽 루벤은 그럭저럭 [[구호 기사단]]과 백성들에게 갈취한 돈으로 건실한 군대를 건설했다. 형편이 펴자, 그는 본토인 [[아르메니아 왕국]]의 왕위 계승을 주장했다. 그는 늙은 레오 왕을 안티오키아로 초청한 뒤 납치했지만, 결국 그는 도망쳤다. 레몽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킬리키아를 향해 레오 왕을 쫓았고, 성의 방비는 구호 기사단에게 맞겼다. 한편 안티오키아의 민회는 매수되었던 것을 후회하며 지도자를 갈아치우고, 윌리엄 파라벨이라는 지도자를 세워 정당한 주인의 귀환을 위해 몰래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아르메니아]]인이 설치는걸 보고 싶어하지 않았던 라틴 귀족들도 이에 가담하여 결국 1219년 레몽이 킬리키아에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레몽과 구호기사단원들, 휘하의 아르메니아군은 내성에서 저항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아르메니아로 야반도주할 수밖에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